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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12-03 16:40
대수맥님의 앵무새 죽이기_낙랑군의 역사_1편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5,455   추천 : 0  

* 대수맥님의 앵무새 죽이기_낙랑군의 역사_1편

http://www.coo21.rgro.net/bbs/zboard.php?id=data_art&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73


【반론에 앞서】

[앵무새]가 주장하려는 전체의 핵심은 아래에서 설명한 몇 가지로 요약되어진다. 

아무튼 결국 이 사람의 견해를 긍정하게 되면
❶ 우리 민족의 역사는 먼 옛날부터 이민족의 식민지로부터 시작되었다
❷ 한사군漢四郡은 한반도에 존재하였다.
라는 결론을 유도하는 교묘한 연결 장치에 다름이 아니다.

그리고 이는 다시
 [일제관학자日帝官學者들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시키는 이론적 모델 - 이를 충실히 따른 이병도와 이기백을 중심으로 한 두계학파 -
다시 이들을 교조敎祖처럼 받드는 현재의 유사식민사학]과 서로 보완하는 저희들끼리 만의 삼박자를 이루고 있다.

1. 사마천은 4군의 명칭을 기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4군은 설치되지 않았다. 고 하는데 사기 [남월열전]을 보아도 군명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군명 따위를 적을 필요는 없었다.

2. 한사군漢四郡이 있기는 했지만 그 위치가 한반도 및 평양 일대가 아니다. 라고 단정하는 근거의 큰 줄거리는 수성현과 갈석산과 요하의 위치 문제인데 다 엉터리이다.

3. 조선에 설치된 4군이 낙랑*현도*임둔*진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각론各論에 들어가서】


■■■■■■■■■ [앵무새 주장 1] ■■■■■■■■■

(변군邊郡 문제)

저는 일반적으로 한사군을 한나라 동방변군(이하 동방변군)이라 부릅니다. 
한나라가 동방에 설치한 변군(邊郡)이라는 뜻입니다.

중국 군현엔 본토의 내군과 점령지역의 변군이 있습니다. 
변군은 내군과 달리 점령지의 통치자를 이용한 간접통치방법을 채택한 곳입니다. 
그런 이유로 인두세를 거두지 못합니다. 
변군마저 설치할 형편이 안 되면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한무제는 동월을 정복하고 설치를 포기했습니다. 
 [사기] 동월열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군리에게 조서를 내려 그곳의 백성들을 모두 강회 일대로 옮겨 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동월의 땅은 마침내 무인지경이 되었다.

한사군이란 명칭은 4개의 군이 지속된 것도 아니고 이름 자체가 군의 정확한 성격을 보여주지도 못하므로 저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 [논증論證 1] ■■■■■■■■■

(변군邊郡에 대한 이해부족이 남긴 치명적인 웃음거리)


1. 머리말

이 장章에서 한 가지 분명한 건 [앵무새]가 제법 그럴듯하게 [변군邊郡]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은근슬쩍 가장 중요한 부분을 빼어버렸다는 점이다. 
하나는 [한족漢族은 변군邊郡을 결코 그들의 영역으로 보지 않았다]는 기본인식개념을 고의로 희석시키고

다른 하나는 한왕조漢王朝가 어쩔 수없이 받아들인 만조선滿朝鮮 지역에 대한 통치 방식인 [군국君國-변군邊郡]이라는 전형적인 사례事例에서 슬그머니 외면하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漢의 일방적인 의도에 따른 변군체제邊郡體制인 것처럼 착각하게끔 유도하는 태도를 보인 점이다. 

그러므로 필자筆者는 한漢이 만조선滿朝鮮 지역에 영향력을 끼친 형태로서
[❶ 만조선滿朝鮮의 강역
-❷ 초기 지배형태인 군국제君國制와  비슷한 제후왕국諸侯王國
-❸ 조선계朝鮮系 제후諸侯들이 죽거나 제거된 뒤 추은령推恩令의 방식에 따라 변방邊方을 갈라 변군화邊郡化
-❹ 일부 지역에 대한 한漢 군현郡縣으로의 편입]이 가장 정확한 분석이라고 여겨진다.

❶ 만조선滿朝鮮이 성장 단계에서 낙랑樂浪*진번眞番*임둔臨屯을 주도적으로 흡취吸聚하여 주主 지배영역으로 삼았던 역사적인 진행과정이 기록으로 입증된다.

❷ 귀부歸附한 단군조선계 장상將相들에게 봉封한 제후왕국諸侯王國으로 [사기史記]의 기록이 적시摘示해주고 있다.

❸ 이 무렵엔 이미 [진번眞番*임둔臨屯]은 없다. 
우리 민족 고유의 강역 명칭이었지만 이미 형해화形解化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낙랑樂浪] 지역이 유일하게 논점의 대상이 될 듯하며 그 외에 접경接境 지대에 한漢이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설치한 [현도玄菟]가 포함된다.

※ 기록상으로도『군郡을 두었으나 초기에는 이를 관리할 여력이 없어 현지인들을 활용하여 경영하였다』는 기술이 등장한다. 
한왕조漢王朝의 영향력이 간접적으로 미친 [변군邊郡]에 불과했음을 입증해주는 교묘한 수사적修辭的 표현이다.

❹ 그 시점은 가장 걸림돌이었던 서부 변경에 대한 정돈(흉노匈奴에 대한 우위優位 확립과 실크로드의 장악)이 마무리되는 시기와 관련하여
특히 [요동遼東]을 중심으로 점진적인 변군화邊郡化가 이루어졌으며 그 중심에 [낙랑樂浪*현도玄菟]가 포함되어진 걸로 여겨진다. 
이 무렵부터 한족漢族의 문헌에 [한漢 요동遼東*한漢 낙랑樂浪]이라는 기록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2. 내군內郡과 변군邊郡에 대한 진실

가. 기본적인 시각

한漢의 변경邊境에 대한 잦은 군사행동은 제국 팽창이라는 단순한 목적만이 아니라 춘추春秋-진秦에 이르기까지
눈에 가시 같았던 이민족異民族들을 침습이 가능한 영역 밖으로 몰아내거나 보다 쉽게 관리하거나 제어하기 위한 최선의 전략에서 나온 궁여지책이었다. 

또한 이를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한 대표적인 군사정책이 바로 군사적 완충지대 설정과 변군邊郡의 활용이다. 
변군邊郡이 가장 위협적이었던 조선朝鮮과 흉노匈奴 지역 그리고 남방南方의 베트남과 양월兩越에 집중된 이유가 그렇다.

이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부터 형성되어
한漢에 이르러 그럴듯한 모양을 갖추어가던 양극단兩極端으로 인식된 세계관에 입각한 천하 질서 확립과 유지를 지탱해주는 영토적 완성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럴만한 계기가 되어준 상황 변화도 빼놓을 수 없다. 
주周의 봉건제封建制가 차츰 자체적인 약점을 드러내면서 진秦에 이르러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군현제郡縣制가 새롭게 등장한다. 

그러는 가운데 한漢의 성립 당시 초楚에 비해 전력상戰力上의 취약점을 극복하려고
부득이 힘을 합친 장상將相들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어 분봉分封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제후왕국諸侯王國과 군현郡縣의 기묘한 동거형태인 군국제君國制가 탄생하였다.

때문에 국가경영의 모순과 갈등이 격화되어 반란(고조高祖 유방劉邦의 유씨계劉氏系 후왕侯王으로의 전환정책에 대한 열후列侯들의 모반과 거병擧兵)과 참칭(僭稱-월越지역의 황제皇帝 자칭自稱)
그리고 왕통王統을 둘러싼 내부 갈등으로 인한 소란이 잇따르자 자구책으로서 황제皇帝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통치제제의 단속이 필연적이었다.

한무제漢武帝는 이런 결함을 명확히 인식하여 제왕帝王의 권위를 키워가는 가운데 신속하게 모순을 잠재우려 했는데 바로 한무제漢武帝 원삭元朔 2년(BC 127)에 반포한 추은령推恩令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제후왕국諸侯王國의 힘은 서서히 줄어들었으며 후왕侯王들의 영지領地에 대한 내군內郡으로의 편입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군현제郡縣制의 기본적인 완성 형태가 서서히 모습을 갖추어나가는 과정에서
통치 영역 밖의 적대 세력에 대한 위협을 영속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새로운 이민족異民族 관리 방식이 여기에 접합하게 되었다. 
이른바 변군邊郡 개념의 창조였다.

과거의 전례前例와는 많이 궤도에서 벗어난 이러한 외교적 방책의 핵심은 이제 정체성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한족漢族이
더 이상 이방인異邦人들을 통합하여 이질적 요소를 안은 채
팽창하거나 타 세력과의 격돌에서 반드시 필요한 자원이나 동맹으로 이용함으로서 국력을 강화하려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더욱 세련된 외교 전략으로 포장되었지만 감추어진 진실은 노골적이고 이분법적인 적대감의 위장僞裝이다. 
즉 대등하지 않은 세력에 대해서는 은사(恩賜-인수印綬와 의책衣幘 분배)와 책봉(冊封-작위爵位 사여賜與) 등으로
간접적인 영향력을 유지하겠다는 [사악한 책략]을 활용한다는 관념을 내포內包했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만만하였던 한고조漢高祖가 흉노匈奴에게 철저하게 패배한 평성平城의 백등산白登山 전투이후
굴욕적인 화친和親을 맺는 과정에서 유경劉敬의 [굴욕을 우월적 지위로 탈바꿈시킨다]는 간교한 계책을 최선最善으로 받아들인
극단적인 선택에 대한 경험을 더욱 발전시켜 변방邊方에 대한 새로운 정책으로 교묘하게 적용한 것이다.


1) 그들이 갖고 싶어 하고 우리에게는 여유가 있는 값진 물건들을 정기적으로 보내어 천천히 타락시킨다
(이는 한족漢族으로서 흉노匈奴의 총신寵臣이 된 중항열中行說에 의해 적나라하게 간파되었다).

2) 먼저 딸을 보내어 합법적인 사위가 되게 함으로서 왕위 계승자가 결국 외손자라는 인척관계를 바탕으로 종속적인 위치를 만든다. 
이어 웅변가를 보내어 올바른 행동(유교적 행동규범)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사상주입을 시도한다. 

그러면 마침내 유교적 관념에서 손자는 할아버지와 동등할 수 없으므로 그들에 대해 황제皇帝의 우월성이 확립되니 전쟁을 하지 않아도 점차 우리의 신민臣民으로 바꿀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접근 방향을 염두에 두어야 만이 이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중앙과 주변 관계 형성의 측면으로 계산되어진 기본개념으로서의 [변군邊郡]의 존재 의미가 있다. 
이를 간과하고 허술한 상식만으로 [변군邊郡]의 문제에 접근하면 실제로 추구하려던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엉뚱하게 포장된 외피外皮에만 매달려 모든 일을 그르치기 쉽다.

나. 변군邊郡의 설치에 따른 새로운 변화

[변군邊郡]의 탄생은 비교적 안정된 중심(내지內地) 형성과 어느 정도 지탱이 가능한 국경의 유지라는 사실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분열에서 통합으로*서로 독립된 우열 경쟁에서 상호 결합된 공동 질서의 구축]을 밑거름으로 강력한 [정주농경국가定住農耕國家]가 중원中原에서 출현할 때까지는 다만 언감생심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한족漢族의 꿈은 한왕조漢王朝라는 구체적인 실체實體에 의해 지극한 현실로서 이루어졌다. 
적어도 외부 세력에 의해 흔들리거나 소멸되지는 않을 자신만의 영역(고유의 영역인 관중關中과 그 이남以南 지대)을 확보하였다는
[정주국가연합定住國家聯合]의 자부심은 특히 고양高揚되었으며 마침내 한무제漢武帝의 자만自慢은 하늘을 찔렀다.

따라서 이러한 보금자리를 영속화하기 위한 지름길이야 말로 변경邊境이 한층 안정되어야만 한다는 과거의 경험에서 변방邊方 지역에 전과는 다른 새로운 질서체계를 주도적으로 형성하고자 했다. 
한마디로 공세적 유목국가 개념이 아닌 방어적인 정착농경민족의 인식에서 나온 필연적인 창조물이 [변군邊郡 경영체제]이다.


❶ 확실하게도 위와 같은 현실적인 대안代案은 통합 이전 한족漢族의 개별국가들이 [북방민족]에 대해 채택했던 정책들과 연결되는 요소들이 많음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접경국가들과의 혼인과 선물 그리고 회유와 교섭책 등).

❷ 즉 국가의 역량 유지를 위해 적대적인 존재에 대해 의도적으로 평화적인 공존관계를 이루는 연결 고리나 견제장치가 반드시 유효하다는
과거 융적戎狄과의 긴요한 경험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❸ 법가法家의 대표적 인물로 진시황秦始皇을 보좌했던 이사李斯조차
『유목적 정치집단과의 군사적 대결은 최악의 결과를 알면서도 행하는 적절치 못한 어리석음이다』라고 역설한 것을 그들의 후손은 잊지 않고 있었다.

❹ 이와 같은 현명한 선례先例(?)들이 한결 유연해진 외교정책을 위한 충분한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아울러 경험이 많지 않고 지휘관 또한 충성심이 약한 고위 귀족으로만 이루어져 현저하게 비효율적인 중원中原의 군사집단으로서는 
군사적으로 정교하게 조직되고 개인적으로 능력주의에 입각하며 집단적으로는 복종심과 응집력이 뛰어난(Stanislav Andreski.  Military Organization And Society 1968  150-151p)
[동방제국]에 대한 우월성을 과시하거나 경쟁하기 보다는 처음으로 등장한 한족漢族의 통합역량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비로소 획득한 귀중한 영역을 영속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익實益 보장이 아직까지는 더 매력적인 방식이었다. 

이런 획기적인 [군사적 방어 전략]은 대체로 성공을 이루었다. 
허나 원천적으로 방어적인 입장에서 출현한 [중원中原의 지역벨트]가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결코 원하지 않았던 제어 대상으로 다가온 [북방제국]에게는 필히 풀어야 할 고삐였다. 

그리고 그 열쇄는 당연히 오직 하나 뿐 이었다. 
교활한 방식으로 도전해온 남방국가연합체의 시도를 일거에 분쇄하고 더욱 강한 압력을 증가하기 위한 [초超 부족적 국가]의 자연스런 탄생이다. 

북방의 거대한 축軸으로 기능한 흉노제국匈奴帝國의 발전은 물론 고구려제국高句麗帝國의 탄생과 완성은 바로 이런 역사적 관점에서 보아야 할 또 하나의 정직한 국면이다.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거추장스런 장막(帳幕-변군邊郡)은 언젠가 누군가는 반드시 걷어내야만 하는 필연성이 있었다. 

따라서 언제나 변군邊郡은 최우선 공격 목표였으며 약탈과 궤멸의 대상이었다(흉노匈奴의 하서河西와 하남河南 공격*고구려의 현도玄菟와 낙랑樂浪 공격). 
따지고 보면 이런 군사적인 응징에는 한漢에서 분명한 원인을 제공했던 측면이 있다.

한무제漢武帝 무렵에 극성을 부린 팽창정책에 대한 교묘한 포장의 표본으로 등장한 [변군계책邊郡計策]은
분명히 한고조漢高祖 때부터 양兩 문명세력간에 지속적으로 지켜져 왔던 묵시적 협상의 명백한 파기破棄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BC 162년 문제文帝가 흉노匈奴와 체결한 조약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선대先代 황제皇帝들이 확립해 놓은 전통에 따라 장성長城 이북에서 활을 쏘는 국가들은 [흉노匈奴 즉 북방제국]가 통치하고
이남에 거주하는 관대冠帶를 쓰는 정주민들은 중국 황제가 통치해야 한다.  <사기주석史記註釋 권110*한서漢書 권 94 상>

❶ [초超 강대세력 상호우위의 원리]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질서는 명백하게 남과 북을 구분하며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사실상 대륙의 세계는 양兩 문명세력의 존재에 대한 교차인정이라는 [이원론적 천하관]에 의해 2개로 쪼개졌다. 
 <고구려>가 이러한 천하관天下觀을 지속적으로 견지했다는 <노태돈>의 지적은 정곡을 찔렀지만 왜 그랬는지?
그런 사유思惟의 근원을 여기까지 심층적으로 밝히지는 못하였다.

❷ 즉 국경 뿐 아니라 서로의 세력권(일정 지역 안에 거주하는 주민과 그들이 속한 국가에 대해 확고한 귀속관계와 직접적인 행정적*정치적*군사적 지배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할 권리)을 확정한 것이다. 
아울러 세력권에 포함되는 독립적인 공동체와 국가들에게도 지배적인 우월성을 인정한 정의로운 판단을 전제로 한 약속이었다.

한무제漢武帝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이런 믿음이 훼손된 일련의 군사행동(서역西域과 서북과 동방지역 등)은 확실히 불법적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연쇄적으로 발생한 흉노匈奴와 조선朝鮮과 고구려高句麗의 무력적인 대응은 한족漢族의 사서史書에 기록한대로 [거칠고 흉폭한 적대 세력]의 일방적인 침습이 결코 아니다. 
지극히 이성적인 사고思考를 토대로 판단한 도를 넘은 불의不義에 대한 상식적인 본보기이다.

▶ BC 134년 마읍馬邑의 섭옹일聶翁壹이『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하여 선우單于와 그 군대를 유인한 후 마읍馬邑에 들어오면 살해하자』는 간계奸計를 내었다. 
그는 화친협약을 갱신한 뒤 상호 신뢰가 이루어진 상황이므로 계략은 성공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는데 
한족漢族으로서는 [북방제국]과의 관계에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부터 비열한 책략 사용이 정당화되었던 전통 때문에
이처럼 상습적인 신뢰 위반을 바탕으로 한 계책은 항상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부적절하게 여기지 않는 야비한 자기기만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전형적인 예例이다.

▶ 아울러 한족漢族들이 즐겨 언급하는 화친조약 파기破棄의 원인을 면밀히 분석해보면 [탐욕스럽고 몰염치한 이방인異邦人]이 아니라
[선우單于를 배반한 수하手下나 이를 이용한 한족漢族의 변방邊方 지휘관들]이었음이 금방 드러난다(한서漢書 권94 상上 등의 기록 참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한족漢族의 자기만족적인 기록을 탈피하여 [초 강대세력의 원리]와 [상호존중에 기반 한 세력권 인정] 개념을 반드시 이해하여야 만이
그동안의 엉뚱한 미몽迷夢에서 깨어나는 동시에 [공정한 룰]을 깨뜨린 한족漢族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이를 한층 명백하게 밝혀주는 사례事例가 더 있다. 

[세력권 존중]을 위반한 대표적인 예例이다.

월지는 우리의 북쪽에 있다. 
어찌 한나라가 그곳으로 사절을 보낸단 말인가? 
만일 내가 중국의 남쪽에 있는 월에 사절을 보내려고 했다면 한나라가 이를 허락하겠는가? 

이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오손에 후한 선물과 뇌물을 보내어 동쪽으로 더 나아가 이전에 혼야왕에 속했던 땅으로 나아가게 하시고 우리와 형제 관계를 맺도록 하십시오...
이는 흉노의 오른 팔을 자르는 것과 같습니다. 
일단 오손과 연합하면 그 서쪽으로 대하에 속한 국가들을 모두 불러들여서 우리의 [외신外臣]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건이 무제에게 간언諫言한 말>

무제武帝가 [초超 강대세력]인 조선朝鮮의 권위를 손상시키려는 계책을 받아들여 만滿을 외신外臣으로 삼았다가
결국 [봉후국封侯國]으로 끌어들인 다음
이윽고 그 지역의 일부를 [변군邊郡]으로 만든 저의底意와 상호협정을 위반한 불법적인 행동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후일 변군邊郡의 주요 설치 지역인 [베트남]의 반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세력화 시킨 결정적인 원인 제공과
월越 지역에서의 동이제국에 대한 제어에 결국 실패한 이유(진晋 시대까지 확고하게 지배하지 못하거나 경영을 포기한 기록들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도 모두 같은 맥락이다.

3. 한漢 시기 군현郡縣에 대한 정확한 이해

한漢의 군현제郡縣 일반화 과정은 역사적인 변천 과정을 겪는다. 
지역에 대한 영역개념이나 통치방식으로서 중원中原 지역은 내군內郡*정벌지역은 외군外郡 또는 변군邊郡이라 했다. 
더욱이 하서회랑河西回廊의 변군邊郡은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다.

하지만 한족漢族이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외군外郡(이하 변군邊郡이라 한다)의 존재양식이다. 
당시 통치자나 관리들이 정확하게 내군內郡과는 특별히 구분했던 인식을 후세의 사가史家나 지금의 역사학자들은 모조리 한족漢族의 공식 강역으로 뭉뚱그리려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당시 영역개념은 제왕帝王의 지배력이 미치는 공간을 의미했다. 
따라서 확실히 장악한 지역을 내군內郡으로 인정하여 공식적인 영토로 받아들였으나
변군邊郡은 사실상 다른 정치적인 실체實體와 중첩되거나 완충지대로서만 기능하는 소극적인 개념이었다.

특히 이런 경향이 강했던 시기는 한무제漢武帝 때로서 월남越南 지역에 9군郡*서남이西南夷에 5군郡 동북방에 속칭 4군郡 그리고 하서河西 지대에 4군郡을 두었다고 기록한다. 
즉 변군邊郡을 일컫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 군현郡縣은 한漢의 공식강역에 설치한 내군內郡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즉 내군內郡에서는 인두세人頭稅와 요역徭役을 부과하고 병역을 징발했다. 
그러나 엄연하게 제국帝國 밖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변군邊郡에서는 이럴 엄두도 내지 못했다는 점을 특히 명심해야 한다. 

변군邊郡에서는 한漢의 법률에 의해 통치가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주민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지배체계나 통치구조와 형식 그리고 풍습(고속故俗)을 고스란히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는 여전히 그들의 수장(首長-군장君長)들에게 맡겨졌으며 황제皇帝는 다만 이를 묵인하는 대가로 그들과의 형식적인 외교관계를 인정한 것이다.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지배력을 행사하는 통치양태는 변군邊郡의 경우 전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❶ 한漢은 흉노전역匈奴戰役(BC 121) 때 투항한 주민들을 북방 요새선 밖의
북지군北地郡*농서군隴西郡*상군上郡*삭방군朔方郡*운중군雲中郡에 나누어 그들의 습속대로 살게 하였으며 간접 관리하였다. 
삭방朔方은 한무제漢武帝가 BC 126년 처음으로 황하黃河 가장 남쪽을 우현왕右賢王으로부터 획득하여 설치한 군郡이었다.

❷ BC 112년 경 한무제漢武帝는 하서회랑河西回廊에 변군邊郡을 설치하면서 처음으로 변경邊境을 순시巡視하였는데 이때에도 태원太原 위쪽의 삭방군朔方郡을 넘지 못했다. 
그 후에도 흉노匈奴의 공격에 대비하여 병력을 주둔(발호장군拔胡將軍 곽창郭昌)시켰는데 주둔지 역시 삭방군朔方郡이었다.

가장 확실하게 알려진 흉노匈奴 지역의 경우 변군邊郡과 변방邊方 운영체제는 다음의 세 형태로 분명하게 구조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❶ BC 127년에 설치된 [변새邊塞]로서 중심방어계선中心防禦系線 안쪽에 둔 郡으로 삭방朔方과 오원五原이 해당된다(Bielenstein  The Bureau of Han Times  109-113p). 
둔전병屯田兵이 상시 주둔하여 교역로 보호와 침략에 대한 사전경고 역할과 원정군에 대한 병참지원을 맡았다.

❷ BC 119년 이전부터 둔 [중개군仲介郡]으로서 변새邊塞 바깥 지역이며 비한족非漢族이 거주하고 군사적 영향력이 쉽게 도달할 수 있는 범위 밖으로 인정되는 완충국緩衝國이다
(Loewe  Records of Han Administration 1  61-63p). 
단순히 한漢에 연맹하는 완충지역으로만 기능하였다. 

❸ [외방外邦]으로서 한漢의 통제 밖에 있는 지방이다.

위와 같은 사전 인식을 밑거름으로 판단한다면 [한사군漢四郡]이라고 부른 지배방식이
사실은 토착수장土着首長을 인정하여 통치를 위임하였던 [조선朝鮮 사후제四侯制]의 변화추이와 직접 맞닿으며
 [왕후국王侯國] 통치양태에서 흔히 사용되던 사례事例였다는 걸 금방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걸 후세 사가史家들은 완전히 왜곡하여 마치 한漢에 처음부터 종속된 내군內郡이나 변군邊郡처럼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투항投降한 장상將相들을 그대로 열후列侯나 후왕侯王으로 봉封하거나 봉지領地를 보장해주는 사례事例]가 변군邊郡의 일례一例인가? 
아니면 한사군漢四郡에게 적용되는 [봉후제封侯制]인가? 
한번 알아보자.

1) 흉노匈奴의 상국上國이었던 조신趙信은 BC 123년 무렵 한漢에 투항하여 흡후翕侯로 봉封해졌다.

2) 동호계東胡系로서 흉노匈奴의 구왕句王였다가 BC 121년경에 투항한 고불식高不識은 1100호戶의 의관후宜冠侯가 되었다.

3) BC 119년 원정 시 귀순한 흉노匈奴 인순왕因淳王 복육지復陸支는 1300호의 장후壯侯로 누전왕樓專王 이즉헌伊卽軒은 1800호戶의 중리후衆利侯로 봉해졌다.

이로 보아 한무제漢武帝 당시에도 왕조王朝 초기부터 시행되었던 열후列侯나 관내후關內侯 제도가 적용되었으며
특히 격돌이 잦았던 변경邊境 지역에서 귀순한 장상將相에 대한 처우는 포용과 협력관계의 지속적인 유지를 위해 이런 방책이 적극 활용되었음을 알려준다.

즉 한무제漢武帝 무렵에도 그들은 정확하게 왕조王朝의 직접 경영지역과 그 밖의 영역을 구분하고 있었으며
대륙 안의 지배력이 미치던 곳을 내군內郡으로 그 영역 밖의 형식만 갖춘 군현郡縣은 변군邊郡이라 구별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변군邊郡을 왕국王國의 실질적인 강역으로 간주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아 한漢의 [군현제郡縣制]는 그 진실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즉 왕조王朝를 확립하면서 원래부터 통치력이 미치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강역을 명백히 구분하는 지방제도로서 내군內郡과 변군제邊郡制를 만들었음을 필히 기억해야 한다. 

이는 영토를 인식하는 입장과 다스리는 방식이 완연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즉 변군邊郡에는 한족漢族이 아닌 그 지역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 맞추어 구별하여 인식하고 이애 걸맞는 통치방식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漢이 바라는 것은 경영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고 언제나 이탈할 가능성이 농후한 이 지역에 대해 이미 얼마간 진출해 혼입되어 살던 한족漢族을 간접적으로 보호하고
원하는 물자를 확보하는 교통로를 분담하여 얻으며(하서河西의 실크로드) 보다 근본적인 이유라면 변군邊郡을 통해 충돌이 예상되거나 부담스러운 이민족異民族 세력을 저지하는 목적이 컸다. 

따라서 한漢이 만滿을 외신外臣으로 삼았던 이전의 책략을 보다 더 세련되고 확실하게 진화시킨 통치 기술의 발전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하서河西나 남방의 변군邊郡 설치 의도와도 상통하는 부분이다.


1) 한무제漢武帝 때 잦은 원정으로 인한 국고國庫의 고갈과 이에 따른 변군邊郡 경영의 부담으로 인해 섣불리 내지화內地化할 겨를이 없었음은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도 익히 짐작이 가능하다.

혜제와 여태후 시절에는 천하가 안락했습니다. 
문제께서 흉노를 정벌하려다가 북변에서 변란이 일어 전화를 입었습니다...그 뒤로  경제께서는 전쟁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천하는 부유하고 평안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병사를 동원하여 흉노를 치면서부터 중국은 국고가 비고 변경 백성들은 말할 수 없는 괴로움과 가난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런 점으로 판단하여 볼 때...
<박사관博士官 적산狄山이 한무제에게 올린 고언苦言>

일례一例로서 한漢과 흉노匈奴가 무력으로 격돌하거나 대치하는 가운데
아직은 미성숙한 한漢이 빈곤과 경제적 파산에 빠져드는 구체적인 과정을 충실하게 관찰하고 있는 기록들이다
(사기史記 권30*한서漢書 권24).

...천하가 이러한 수고를 그대로 감당해야 했다. 
흉노匈奴와의 갈등은 나날이 격렬해지면서 원정에 동원되는 병사들은 군장軍裝을 스스로 챙겨가야 했으며 집에 남은 이들은 더 많은 군수품軍需品을 보내야 했다...
변경 안팎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고통스러워하며 보급품을 보내야 했다.

지친 백성들은 궁핍해졌으며 세금을 피할 묘안을 찾으려고 애썼다.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은 소모되었고 곧 부복해졌다. 
군수품 외에도 승전한 장수와 병사들*항복한 이들에게도 선물을 지급해야 했다. 
대규모 말 사육계획도 비용이 많이 드는 것으로 밝혀졌다. 

BC 121년 한漢의 군비軍費는 100억에 달하였으며 BC 119년에는 국고가 고갈되어 병사들은 보수를 조금도 받지 못했다. 
(변군邊郡의) 관개灌漑와 황하黃河에 제방堤防을 축조築造하는 공역工役은 기금이 부족하여 끝마칠 수 없었다. 
<사기주석史記註釋 권30>

(BC 123년) 대장군 위청은...흉노를 공격하여 1900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적의 머리를 베거나 포로로 잡은 군인들은 20만금 이상을 하사받았다. 
수만 명의 포로들도 후한 보상을 받았으며 정부에서 제공하는 의복과 음식을 지급받았다. 
그러나 한漢이 잃은 병력과 말은 10만이 넘었으며 상실한 무기와 갑옷과 군수품 수송에 든 비용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사기주석史記註釋 권30>

(BC 121년) 표기장군 곽거병은 흉노를 거듭 공격하여 4만 명을 붙잡았다. 
그 해 가을 혼야왕이 수만 명을 이끌고 항복했다. 
한漢이 받아들이고 수레 2만기를 보냈다. 
이들은 수도에 도착해 선물을 받았다. 
공을 세운 군인들에게도 보상이 주어졌다. 
그 해 여기에 든 경비는 수백억이 넘었다. 
<사기주석史記註釋 권30>

변경邊境 경영이 한漢의 경제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심각했으며 이 부분에 관해서 공감하고 있던 <사마천司馬遷>조차 유례없이 정확한 감각으로
당시의 심각한 어려움과 그로 말미암아 파생된 갈등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는 [염철론鹽鐵論]의 변경정책에서도 매우 중요한 논의대상이 될 정도였다.

(문제文帝 시대에) 변경 수비대가 여러 곳에 세워졌다. 
변경에서 생산되는 곡물은 군대에 공급하기에도 부족했다. 
따라서 나라에 곡물을 바치고 수비대까지 운송할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하여 명예직을 수여했다. 
어떤 이는 이런 식으로 대서장大庶長까지 올라가기도 하였다. 
<사기주석史記註釋 권30>

이런 상황과 겹친 대 기근(BC 120년)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은 군국郡國 창고를 비워 구제하거나
부유한 자들에게 돈을 빌려주도록 하는 등의 정책에도 해결하지 못해 결국 7만이 넘는 주민들을 관동關東의 삭방朔方에 옮겼다. 

하지만『엄청난 이주移住 비용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어 이로써 국고國庫는 완전히 텅 비었다.  사기주석史記註釋 권30』고 기록할 정도여서
우리가 보통 한무제漢武帝 시대하면 떠오르도록 만든 [자부심과 자만감 그리고 경제적 번영으로 충만한 한제국漢帝國]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사마천司馬遷>은 매우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때문에 [북방정책]을 보는 한漢의 관점변화와 [변군邊郡 경영]의 실행 자체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정책기조政策基調 변화의 경위도 매우 담담하게 알려준다.

2) 변경邊境에 대한 지속적인 관리능력의 한계는 변군邊郡을 영향력 안에 끌어들이기 위해 들어가는 군량軍糧과 물자를 조달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는
왕조王朝 내부의 취약성이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아래에서 주목할 점은 제시된 작爵의 가격이 상당히 높다는 사실인데 단순히 관官에 바치는 게 아니라 필요로 하는 지역에 대한 수송까지 요구함으로서 부담이 대단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 600석石을 2000리 거리에서 수송할 경우 1대에 25석을 싣는다는 당시의  기준으로 추산했을 때 대략 우차牛車 24대가 50일 정도 걸리며
1인 한달 3석으로 본 수송인원 50인의 식량도 약 250석이 더 필요하다(이성규李成珪 전한前漢 말末 지방자원의 동원과 배분). 
<응소應劭>의 [풍속통의風俗通義 권2 정실正失 효문제孝文帝 조條]를 기준(1석石 500전錢)으로 한 가장 낮은 가격으로 환산해도 600석의 가격만 계산했을 때 30만전이다.

■■▶ 민民으로 하여금 변경邊境에 속粟을 보내되 600석石이면 상조(上造-2급)의 작爵을 내리고(급별로 작爵을 조금씩 증가시켜) 4000석石이 되면 오대부(五大夫-9급)
12000석石이면 대서장大庶長이 되게 하는데 (속粟의) 다소에 따라 작급爵級을 차등한다. 
<문제文帝 때 조착鼂錯의 건의로 시행된 납속수작納粟授爵>

3) 변군邊郡에 대한 지속적인 관리나 통제력 행사가 어려웠음은 사봉徙封이 내군內郡과 후국侯國에서만 빈번하게 일어난 아래의 분석결과에서도 입증되는 부분이다.

■■▶ 부평후富平侯 장안세張安世는 진류군陳留郡에 시봉始封되었으나 장연수張延壽 때 평원군平原郡으로 사봉徙封되었다. 
<한서 외척은택후표外戚恩澤侯表 말격末格(각 열후란列侯欄 맨 아래 칸의 군명郡名을 기록한 곳) 692P*한서 권69 장탕전張湯傳>

■■▶ 안창절후安昌節侯 장우張禹는 하내군河內郡 안창현安昌縣에 봉封해졌다가 여남군汝南郡으로 이동되었다. 
<한서 외척은택후표外戚恩澤侯表 말격末格 706p와 수경주水經注 심수주沁水注와의 비교>

■■▶ 동양애후東襄愛侯 유관劉寬은 신도국信都國에 봉해졌다가 신도군信都郡으로 옮겨졌다. 
수고후修故侯 유복劉福도 청하국淸河國에 시봉始封했다가 청하군淸河郡으로 이동되었다. 
<왕자후표王子侯表 하 말격末格 437P*488P>

■■▶ 의성강후宜城康侯 유언劉偃도 치천국菑川國과 인접한 한군漢郡에서 평원군平原郡으로 사봉徙封된다. 
<왕자후표王子侯表 하 말격末格 무제 26년>

4) 아울러 또 한 가지 특기할만한 사실은 거의 대부분의 사봉徙封이 열후列侯의 세력을 통제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이 등장되었던 한무제漢武帝 시기에 집중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전한前漢 말末 무렵에서야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음에도 변군邊郡의 실상은 거의 변동이 없다는 점이다. 
이는 변군邊郡에 대한 통제력 여부와 직결된다.

❶ 말격末格에 군명郡名이 기록된 323개 중 41%인 130여개*전체 후국侯國의 35%에 달하는 숫자가 사봉徙封되어 내군화內郡化된 것이 한무제漢武帝 무렵이다.

❷ 무제武帝 원삭元朔 2년(BC 127) 추은령推恩令이 반포되고 난 뒤로부터 그동안 봉후국封侯國이었던 왕자후국王子侯國은 더 이상 그 지위를 누릴 수 없게 되었다. 

제후왕諸侯王의 적사嫡嗣 이외의 자제들에게도 제후왕국諸侯王國의 봉지封地를 나누어주면서 한군漢郡에 소속되게 하였다. 
봉왕국封王國을 약화시키려는 의도 아래 실시된 군현제郡縣制의 확대 과정이었다.

❸ 제후국諸侯國의 변경에서 분리되어 별도의 분국分國이 된 이들 지역은 결국 한조漢朝의 내군內郡으로 편입되어간다. 
한漢의 내군內郡 확대 과정이면서 비로소 직접 지배 영역인 내군內郡과 이와는 성격이 다른 변군邊郡의 위상이 명확해지기 시작되는 명확한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❹ 그러나 전한前漢 말末에서부터 열후列侯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다시 세력을 회복하고 강력한 호족화豪族化 경향을 보였다.

이와 같은 한족漢族의 중심과 주변 즉 그들 중심의 천하질서 유지 방책이 통치 형식으로 발현된 것이 바로 내군內郡과 변군邊郡이었으며
이런 형태는 그 후로도 꾸준하게 이어져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엔 막부幕府로 당대唐代에는 기미부주羈미府州로 명明 때는 기미위소羈미衛所로 청淸 이후부터 토사土司 체제로 달라진다.

4. 전한前漢 시대 초기의 군국제君國制 

주周의 봉건제封建制와 진秦의 군현제郡縣制를 병용한 지방제도로서 수도首都에서 가까운 지역은 관리를 파견하는 군현제郡縣制로
멀리 떨어져 있는 영역은 왕족王族과 공신功臣을 제후諸侯로 봉封하는 봉건제封建制로 통치하는 방식이다.

왕조王朝 개창開倉 초기의 이성왕후異姓王侯 대부분은 유방劉邦과 같은 하층계급출신으로 공로에 따라 영지領地를 얻을 것을 희망하면서 따랐던 인물들이었던 만큼
일률적으로 억압하는 정책은 오히려 반감을 일으켜 아직 안정되지 않은 왕조王朝의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초기에는 103개의 군국郡國이 존재했는데 왕실王室이 직접 장악했던 것은 15개 군郡이었다. 
봉후왕국封侯王國들은 진秦 때의 여러 군郡을 관할하는 바람에 지역이 광대해져 마치 중앙정부의 축소판과 같았다.

아무튼 군국제郡國制는 자체 모순을 안고 있었는데
유방劉邦 말년에 이르러 이성제후왕異姓諸侯王은 거의 제거되었음에도 동성제후同姓諸侯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져 마치 독립국과 같아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BC 154년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을 계기로 경제景帝는 제후왕국諸侯王國의 영지領地를 축소하고 권한을 빼앗았으며
무제武帝는 추은령(推恩令-왕국王國의 봉지封地를 모든 자제들에게 분봉分封토록 한 조치)을 반포하여 규모와 세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

(계속)


최고관리자 15-12-03 16:57
 
대수맥님 논리에 반박해 봐라
이미친 매식자들...
그정도 머리나 되면 다행이겠지...등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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