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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칼럼
 
작성일 : 15-08-03 11:38
(왜 가슴이 아픈가?) 조선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8,080   추천 : 0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제2의 약산 김원봉 선생의 출현을 고대해 봅니다]
[친일파 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와 역사매국노 암살이라는 성급한 과제를 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애국애족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린 애국지사 후손은 4대가 빌어먹고 살고
나라팔아먹은 매국노 후손은 4대가 떵떵거리고 살고
참으로 대단한 대한민국 이제 친일매국노와 그 후손들 처단해라...


* 김원봉 장군의 외침 (어록)

조선의용대는 조선민족해방의 선봉대로서 천백만 자기동포를 환기해서 조선민족해방을 쟁취하자는 것이요.
우리는 이 동아시아에서 일본제국주의를 완전히 축출하자는 것입니다.(일부 정정)
중국의 형제들 긴히 악수합시다.
오늘 우리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참으로 우리의 진정한 동아시아 행복사회를 건설합시다.


* 영화 암살 감독 '최동훈'

“김원봉은 일본이 가장 무서워했던 존재였다.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내걸었을 정도로 일본 입장에서는 꼭 잡고 싶은 인물이었다.
김원봉은 의지가 남다른 사람이고 정말 잘생겼었다.

부인 박차정 여사가 중국에서 죽었는데, 김원봉이 한국에 올 때 박차정 여사의 옷을 가슴에 품고 왔다.
부산에서 ‘암살’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는데, 박차정 여사의 생가가 있더라.
그 때, ‘과거에 있었던 사실,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있는 사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 약산 김원봉

약산(若山) 김원봉은 경남 밀양 출생으로 1918년 중국 난징 진링대학에 입학했다.
1919년 12월 의열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일제 수탈 기관 파괴, 요인암살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하였다.

1925년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지도하면서 중국 관내지역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중국국민당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라는 강력한 군사조직을 편성하기도 하였다.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였으며,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지내다가 8·15 광복 후 귀국하였다.

김원봉은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하여 그 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그 후 1952년 5월 노동상, 1956년 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 11월 김일성 비판을 제기한 옌안파 제거 작업 때 숙청되었다.(출처 두산백과)

김원봉은 김구와 필적할만한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가였으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6년여에 걸쳐 대규모 암살계획 및 경찰서,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에 대한 폭탄 투척사건 등을 배후에서 지휘했고,
이후 김구와 함께 공동으로 동포에게 보내는 공개통신문을 발표하는 등 연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당시 일제는
‘김구’에게 60만원의 현상금을,
‘김원봉’에게는 100만원의 현상금을 내걸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기준으로 따지면 약 200억~300억에 달하는 금액이다.

(중략)


* 조선총독부 폭파사건

1921년 9월 조선총독부에서 폭탄이 터져 수십명의 관헌들이 중경상을 입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나 7개월간의 대대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범인은 잡지 못했고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일제의 사령탑인 총독부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들어가 폭탄을 터트린후 유유히 사라졌다.

대범하기 그지없는 이 사건의 주인공은 '의열단원 김익상'이었다.
비행사를 꿈구던 그가 항일투사로 변모한 것은 24살의 젊은 나이에 의열단장을 맡고있던 김원봉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오.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오.
이것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하오"

* 22살에 의열단 조직 단장 맡아

1921년 3월 5일 동아일보
의열단은 1921년 3월 밀양폭탄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세상에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파괴와 요인암살을 위해 중국에서 폭탄을 반입한것이밀정의 고발로 발각됐고 그로인해 15명의 단원들이 검거된 것이다.
당시 신문기사는 의열단이 중국지린성(吉林)의 빠후먼에서 결성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16년 중국유학길에 올랐던 김원봉은 3.1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지린으로 향한다.
지금은 번화가가 되어 있는 거리.
김원봉이 지린에 도착한 1919년 이 일대는 성외곽에 한적한 농촌이었다.
당시 성곽에는 성밖으로 나가는 8개의 문이있었고 빠후먼은 그중 하나였다.

1919년 11월 9일 지린성 빠후먼 외곽에 외딴집으로 13명의 청년들이 모여든다.
김원봉과 그의 학교 고향동료들이었다.
밤새 회의를 거듭한 이들은 이튿날 새벽, 전부터 뜻을 모아온 항일결사조직의 결성을 선언한다.
그것이 바로 1920년 일제의 주요기관파괴와 요인암살에 나서 세상을 놀라게한 의열단의 탄생이었다.

* 의열단의 5파괴, 7가살 원칙

의열단에는 5파괴, 7가살 이라는 원칙이 있었는데
그것은 조선총독부 이하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5개의 주요 파괴대상과
조선총독 이하 군부수뇌, 반민족적 인사등 7가지의 암살대상을 규정한 것이었다.

* 의열단 주요 의거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박제혁)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최수봉)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김익상)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나석주)
친일파 박용만 암살 (유자명) 등을 감행 함

* 그러나 의열대장 김원봉을 버린 조국 그리고 친일파

김원봉은 남은 대원들을 데리고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 휘하로 들어간다.
광복군 부사령에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에 취임한 김원봉은 1945년 해방을 맞는다.

해방 정국에서도 좌우익 합작을 시도했던 김원봉은 민족주의 세력은 물론, 새롭게 친미파로 변신한 친일파들에게도 위협을 받았다.
특히 1947년 3월 악질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남로당 파업 연류와 관련해 체포된 김원봉은 화장실에서 바지도 못올리고 끌려가 따귀를 맞는 등 엄청난 수모를 당한다.

일제강점기 일본군과 경찰을 떨게 만들었던 독립운동가는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경찰 출신에게 뺨이나 맞는 신세가 된 것.
1948년 김원봉은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기 위해 김구, 김규식과 함께 4월 남북협상회의에 참가한다.

김구과 김규식이 돌아올 때 북한에 남는다.
그 만큼 친일 경찰에게 당한 수모는 크나 큰 상처였던 것.

그러나
1958년 북한의 김일성은 김원봉이 장졔스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숙청하고 만다.
남한에서도 월북한 정치인으로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 됐던 김원봉은 북한에서도 명예 훼복을 이루지 못했다.

‘암살’을 통해 역사 속에서 그 뛰어난 업적과 활약상에도 불구하고 잊혀질 뻔한 인물이 되살아난 셈이다.

젠장 구국영웅을 보호하지는 못할 망정 공산당으로 매도해 공격한 친일파들...
이 지겨운 친일파들을 언제쯤 제거할 수 있을까?
정말 기가막힌 대한민국!

(계속)

* 자료 신문기사 등 종합편집
  http://blog.daum.net/jongwon555/11760216


최고관리자 15-08-04 09:56
 
* 광복 70년 프랑스 처럼 친일 매국노들 처단만 했어도 오늘날 이꼴은 아닐텐데....이제라도 그 친일파들을 처단하자!

해방후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되어
친일 행위자 500여명을 체포했으나,

이중 실형판결이 내려진 것은 12건(5건은 집행유예)에 불과하고,
유일하게 사형을 언도 받은 김덕기도 1950년 감형으로 풀려납니다.
당시 실형으로 복역한 자들도 모두 6·25전쟁 기간 동안 석방됩니다.

일제 35년동안 친일매국하고 독립군을 살해한 친일 매국노들을 대한민국 정부는 단 한놈도 처단하지 못하고,
오히려 제산과 권력을 유지, 그 자손들이 오늘날 국* 등 요직을 장악하고 있는게 기막힌 현실입니다.

이때문에 아직도 이땅은 역사매국노들 천지입니다.
역사는 아직 일제 식민사학 천하!
이병도 신석호 제자들이 4대에 걸쳐 떵떵거리고 사는 미친 대한민국

* 프랑스는 매국노들을 완전 제거 한 것은 물론 씨관리를 통해 다시는 매국행위를 못하게 조치하였습니다.

프랑스는 1944년,
나치협력자를 색출 무려 100만명 체포 구금하고
이중 사형 6,763명
유기징역 26,529명 등 엄벌을 내립니다.

매국노에 대한 철퇴를 내린 것이지요. 

또한 비국민 판정 제도를 도입하여
95,000명에게 시민권 박탈, 선거권, 공직진출 등 권리를 박탈합니다.
다시는 그 후손 씨들이 나라팔아 먹는 짓에 나서지 못하게
아주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켜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저 친일매국노들을 처단 하지 못한 업보로

친일매국 한놈은 4대가 떵떵 거리며 살고
애국애족하여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독립투사의 후손은 4대가 밥을 빌어먹고 살고 있습니다.

이게 일만천년 천손민족의 오늘의 자화상인가요?
불쌍한 대한민국 제발 깨어나세요.

이제 역사매국노들 암살을 위한 의열단을 조직합시다.

복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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