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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9-01 21:36
김석동_한국사 교과서에 나온 고조선은 잘못 기록된 역사다?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301   추천 : 0  

[이땅의 식민사학자들...대표적으로 교원대 송호정...이런 역사 조작단 괴수들을 언제쯤 척결할수 있을까?]

* 한국사 교과서에 나온 고조선은 잘못 기록된 역사다?

http://www.insight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641 
 
-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 고조선에 대한 우리 사서의 기록들

- 삼국유사.<국립중앙박물관>

고조선에 대한 역사 기록, 특히 단군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고려 때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 기록은 다음과 같다.

“2000년 전쯤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세웠다.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불렀는데, 요 임금과 같은 때다.…
그때 곰과 호랑이가 굴에 같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늘 환웅 신에게,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세요’라고 빌었다.
환웅 신은 신령스런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낱을 주고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모습을 얻게 될 거야’라고 말했다.
곰과 호랑이는 받아서 그것을 먹고 21일을 꺼렸다.
곰은 여자의 몸이 됐다.
그러나 호랑이는 제대로 꺼리지 못해 사람의 몸이 되지 못했다.

곰 아가씨는 누구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다.
잉태하고 싶어 늘 신단수 아래에서 빌었다.
이에 환웅이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 혼인하고 잉태하여 이들을 낳으니, 단군이라 불렀다.…
단군 왕검은 요 임금이 즉위한 지 50년 곧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불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 궁홀산이라고도 하고 지금은 달(達)이라고도 한다.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기원전 1122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의 왕으로 보냈다.
단군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 가고,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숨어 산신이 되었는데, 1908세를 살았다.”

앞서 소개한 대로 영·정종 시대의 학자 이종휘는 기전체 사서인 <동사>에서
<단군본기>를 설정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단군 시대에는 동쪽 문명국인 우리나라에 임금이 없어서
백성들이 어리석은 상태였고 금수와 더불어 무리 지어 살았다.
이에 단군이 백성들에게 편발개수를 가르치니
비로소 임금과 신하, 남자와 여자의 분별과 음식과 거처에 절도가 있게 되었다.…
단군은 대체로 나이 수천 세에 죽었다.
아들 부루(扶樓)가 왕이 돼 갑술년에 도산에서 하우씨에게 조회했다.
부루 이후는 세계와 연보가 없어져 전하지 않는다.…
단군은 평양에 거처했는데,
은주의 교체기에 후세 자손이 백악산 아래로 옮겼으니 단군이 즉위한 지 1508년이었다.
기자가 8조의 가르침으로 동쪽 문명국인 우리나라를 이어서 다스리니 우리나라의 풍속이 바르게 됐다.”

이외에 앞서 소개한 위서 논쟁이 있는 고대 사서들에는 단군조선의 역사가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단군세기>(<환단고기>의 일부) <규원사화> <단기고사>에는 단군이 47대를 이어왔다 하며
역년과 치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서로 상이한 내용도 있다.

예를 들면 <단군세기> <단기고사>에서 고조선 역년은 2096년, 규원사화에서는 1205년이라 기록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환단고기를 어떠한 관점에서 수용하는가에 따라
한국 고대사에 대한 인식은 현저한 차이가 나게 된다고 한다.

<규원사화>는 주로 전승된 민속자료에 의해 엮어진 것으로
상고사의 역사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기보다는
한국 문화의 저류를 이어 온 민속적 역사 인식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단기고사>는 발해본과 한문본이 전하지 않고 국한문본만 남아 사료적 가치가 의문시되고 있으나
다른 상고 사서와 비교해 그 기본 틀이 다르지 않아 면밀한 분석과 재평가가 요망되는 사서라고 한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고조선이나 단군에 대한 기록이나 역사는 신화라는 관점에서 인식돼 왔다.
먼저 그동안 주류 사학계에 의해 지지됐고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배워온 고조선의 영역과 연대를 소개한다.

한국사 교과서에 통용된 고조선 역사

가장 오래된 역사학술단체 진단학회가 편찬한 <한국사(고대편)>에서는 고조선에 대해
‘단군설화의 해석과 아사달사회’
‘재래 소위 기자조선의 정체와 주위 제종족 및 연·진·한의 관계’
‘위씨조선과 한 제국의 동방침략’의 순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단군의 개국 시기가 요(堯) 시대라는 것은
민족적 자존심이나 비슷한 고대 명칭을 꼬투리로 삼은 것이라 설명하고
단군이 도읍하였다는 ‘아사달’은 지금의 평양 부근으로 비정했다.

따라서 한나라에 의해 위씨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을 세운 위치 또한 대동강 지역을 비롯한 한반도 북부라 한다.
이것은 <삼국유사> 등이 말하는 기원전 24세기 고조선 개국설은 설화이며
고조선은 훨씬 이후에 한반도 북부에 있었던 군소세력이라는 뜻이다.

진단학회를 이끌어온 이병도 전 서울대 교수는
<한국고대사연구>에서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위치한 ‘동방한사군현도’라고 싣고 있다.

이기백 전 서강대 교수가 <한국사신론>에서 밝히는 고조선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한반도와 만주 등지의 청동기 시대는 대체로 기원전 10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까지 계속되었다고 봤다.
부여, 예맥, 임둔, 진번 등과 더불어 여러 성읍국가의 하나인 랴오허와 대동강 유역의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경에는 중국에까지 그 존재가 알려질 정도로 성장했다고 한다.

이후 기원전 4세기 말 연의 세력에 밀리면서 점점 쇠약해갔고
기원전 194년 위만이 고조선의 준왕을 축출하며 스스로 왕이 됐다.
그 후 기원전 108년 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했으며
그 위치는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의 고조선 지방,
진번군이 자비령 이남 한강 이북의 옛 진번지방,
임둔군이 함남의 옛 임둔지방,
현 도군이 압록강 중류·동가강 유역의 예 지방이었다.

한우근 전 서울대 교수는 <한국통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청동기 문화가 황하 유역에서 대동강 유역으로 번져감에 따라서
이 지역의 여러 부족 국가는 하나의 부족 연맹체를 형성하게 됐다.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해 대동강 유역까지 걸쳤던 이 부족 연맹 세력은
단군왕검이라고 일컫는 군장을 그들의 시조로 받들게 된
곰 토템 씨족의 족장 세력이 그 맹주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고조선의 부족 연맹 왕국이었다.
이 세력은 그 지역에 있어서의 지석묘 건조연대에 비추어,
늦어도 기원전 4세기경에는 형성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때 연인인 위만은 천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해 왔다.
고조선의 북경을 수비하겠다는 그의 약속에 따라 고조선 왕은 그에게 그 지방을 봉하여 주었다.
그가 이같이 하여 북방 수비의 임무를 맡는 동안에 유이민 집단의 세력을 키워서 그것을 배경으로,
드디어 고조선 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고조선 지방의 지배자가 되었다.
왕은 남하하여 진국(辰國)으로 가서 스스로 한왕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이것은 대체로 기원전 194년에서 108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이 4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고조선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으로서는 매우 유감스러우나 확실하게 단정하기가 어렵다.
어떤 학자는 낙랑군의 치소(治所)가 된 고조선의 수도(왕검성)는 바로 평양이라 하고,
따라서 한사군의 영역을 한강 이북의 지역으로 보는 데 대위 지역으로 보는 데 대해,
고조선과 한사군의 영역을 요동 지방에 비정하는 주장이 여러 학자에 의해서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고조선의 연대를 기원전 4세기경으로 보고 있으며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평양 부근설과 요동 지방설을 다 소개하고 있다.

변태섭 전 서울대 교수는 <한국사통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대동강 유역에 자리잡은 고조선은 이미 청동기 시대에 성숙한 군장 국가를 이루고 있었으니,
그것은 단군조선의 건국 건설로부터 알 수 있다.
단군 신화에 대한 기록은 고려 후기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가 처음이지만
그 신화는 고대로부터 고기(古記)의 내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조선의 정치적 중심지를 대동강 유역으로 본 종래의 전통설에 대해
근래에는 만주의 요령 지방으로 보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위씨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함락되고 한(漢)이 설치한 낙랑군의 군치와
그 관하인 조선현이 대동강 유역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고조선 이동설이 제기돼 처음 요령 지방에 있었던 중심지가 뒤에 대동강 유역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
이것은 초기의 고조선 중심지는 요령 지방이었지만 뒤에 대동강 유역으로 옮겨왔다는 견해인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고조선이 초기 국가 형태로 발전한 것은 청동기 시대 말기인 기원전 5~4세기경으로 생각된다.”

요약하면
고조선은 기원전 24세기 국가가 아니라 기원전 5~4세기에 형성된 국가이며
고조선 후기 영역은 대동강 유역이라는 것이다.
한국교원대학교에서 지은 <아틀라스 한국사>는 고조선의 존재 시기와 위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조선은 기원전 7세기 무렵부터 기원전 108년 한나라에 멸망할 때까지 존속한 우리 민족 최초의 나라를 가리킨다”
“처음 한반도 대동강 유역에 자리 잡은 고조선은 점차 국가로 성장하면서 세력을 넓혀
요동 지역 한사군 위치까지 관장하게 되었다”
“한나라는 고조선 땅에 ‘군’이라는 식민지, 즉 한군현을 만들었다.
군 밑에는 현을 두고 한인(漢人) 군 태수와 현령을 보내 식민 통치를 했다.”

위와 같이 그동안 주류 사학계에서는 대부분 고조선이 대동강 중심의 한반도 북부 지역에 존재했다고 보고 있다.
고조선의 국가 형성 연대도 <삼국유사> 등이 밝힌 기원전 24세기를 인정하지 않고
(따라서 신화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 기원전 4~5세기경에 와서야 국가가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주류 학계 부정하는 고조선 학설

그동안 통용되어온 주류 사학계의 고조선에 대한 역사적 시각과 전혀 다른 논리를 전개해온 연구들이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1931년에 저술한 <조선상고사>에서 단군왕검의 연대를 기원전 2000년 이전으로 기술한다.

“乃往二千載, 有檀君王儉, 立都阿斯達
(내왕이천재, 유단군왕검, 립도아사달: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세웠다)이라 하였으므로,
고구려 건국 이전 2000년이 단군왕검의 원년(元年)이고,
삼국시대 중엽까지도 ‘신수두’를 신봉하여 단군이 거의 정치상 반(半) 주권을 가져서
그 시작에서 끝날 때까지가 이천 몇 백 년은 될 것이니, 어찌 1000년만으로 계산하겠는가.”

영역과 관련해서는 고조선에는 3인의 대단군이 있어 대왕(大王)인 ‘신한’은 하얼빈을 중심으로 만주 지역,
부왕(副王)인 ‘말한’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
또 다른 부왕인 ‘불한’은 개평을 중심으로 발해만 지역을 다스렸다고 한다.
신·말·불 세 한이 삼경에 나뉘어 주재하면서 조선을 통합 운영했다는 것이다.

“대단군의 삼경(三京)은, 그 하나는 지금의 하얼빈(哈爾濱)이니,
고사(古史)에 부소갑 혹은 비서갑 혹은 아사달로 기록된 곳이며,
그 둘은 지금의 해성·개평 등지로서 고사에 오덕지(五德地)
혹은 오비지(伍備旨) 혹은 안지홀(安地忽) 혹은 안시성(安市城)으로 기록된 곳이며,
그 셋은 지금의 평양이니, 고사에 백아강 혹은 낙랑 혹은 평원 혹은 평양으로 기록돼 있는 곳이다.”

한편
기원전 10세기경부터 대략 500~600년 동안은 대단군조선의 전성시대였으며
기원전 4세기경에 삼조선으로 분립됐다 한다.
“삼조선(三明鮮)은 곧 세 ‘한’이 분립한 뒤에 서로 구별하기 위해
‘신한’이 통치하는 지역은 ‘신조선’이라 했고
‘말한’이 통치하는 지역은 ‘말조선’ 이라 했으며
‘불한’이 통치하는 지역은 ‘불조선’이라 한 것이다.”

“삼조선이 분립하기 이전에는 신한이 전 조선을 통치하는 대왕이 되고 말·불 양한은 그 부왕이었으므로,
신한이 ‘ᄋᆞ스라’에 주재할 때에는
말·불 양한의 둘 중 하나는 ‘펴라’에,
다른 하나는 ‘아리티’에 머물러 있으면서 지키고,
신한이 아리티나 펴라에 주재할 때는 말·불 양한은 또 다른 두 서울에 나뉘어 머물러 있으면서 지켰다.”

“<사기> 조선전에는 위만이 차지한 불조선만을 조선이라 쓰고,
신조선은 동호(東胡)라 칭하여 흉노전에 넣었으니,
이제 <사기> 흉노전에서 신조선의 유사(遺事)를,
조선전에서 불조선의 유사를 주워오고,
<위략>이나 <삼국지>의 동이열전(東夷列傳)의 기록을 교정해 이를 보충하고,
말조선은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중국사의 붓끝에 오른 적은 적으나
마한·백제의 선대는 곧 말조선 말엽의 왕조이니,
이로써 삼조선이 나뉘어 갈라진 역사의 대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단재 선생은
고조선 연대에 대해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연대를 인정하고
고조선의 영역은 만주, 한반도, 요동 및 요서 지역에 걸친 대제국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북한 사회과학원의 역사학자 리지린은
1962년 <고조선연구>를 저술해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는 중국의 고대문헌 등을 고증해 고조선의 위치를 설명한다.

“<관자>에서
기원전 7세기경 고조선의 영역은 의무려산(오늘의 요서지역) 좌우에 걸쳐 있었다고 주장할 근거가 있게 된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지리 서적인
<산해경>은 고조선의 위치를 조선 반도 내에서 찾을 수 없으며 발해 연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근거를 제공해준다.”
“<전국책> 자료에 의하면 고조선 영역은 오늘의 우리나라 영역으로 될 수 없으며
대체로 오늘의 요동과 요서에 걸치는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마천도 고조선을 오늘의 우리나라 영역으로 본 것이 아니라
요동과 요서에 걸치는 지역으로 인정했다고 우리는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사기> <한서> <삼국지·위지> 등을 보더라도 고조선이 오늘날 한반도에 위치했다고 주장할 근거가 없다고 한다.
한편 당대 이후 정사들에서는 대체로 고조선이 오늘의 우리나라 영역(한반도)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후대의 요사는 고조선의 위치를 오늘의 요동으로 기록하고 있고
청조 건륭 시대 사가 상당수가 고조선의 위치를 오늘의 요동으로 인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 연나라의 장군 진개의 침략 등으로 고조선의 영역도 기원전 3세기 초에 대변동이 있었다 한다.

구소련 과학아카데미의 역사학자 유 엠 부찐(U.M.Butin)은
1982년 러시아판 <고조선-역사·고고학적 개요>를 출간했다.
그는 중국 사서 등을 분석해 고조선의 영역을 밝히고 있다.

“패수는 한대에 조선과 옌(燕)의 경계가 되는 강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친(秦)의 옛 황무지 혹은 버려진 땅이 공식적으로 조선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고조선은 확실히 라오똥 지방의 대부분 지역, 지린재 지방의 대부분(지린의 서북과 동쪽 지역 제외),
한반도 북부(함경북도의 북쪽 지역과 강원도의 남쪽 지역 제외)를 포함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쓰고 있다.
고조선의 연대도 한국 주류 사학계보다 훨씬 이른 시기로 보고 있는 것이다.

윤내현 전 단국대 교수는 1994년에 발표한 <고조선연구>에서
기존의 국내 사학계와는 다르며 신채호 리지린·유 엠 부진의 학설과 일맥상통한 새로운 고조선 역사를 기술한다.
그는 이렇게 상반된 한국 고대사의 두 가지 체계가 존재하는 데 대해
<제왕운기>와 <고려사>의 문헌 기록 때문이라 한다.

사료 중심의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심백강 박사는
고조선 건국 연대와 관련해 “<산해경>에는 ‘발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을 조선이라 한다’고 했다.
<산해경>의 이 기록에 따르면 오늘날의 발해만 부근에 있던 고대 국가는 고조선으로,
그 위치와 요서에서 발굴된 하가점하층 문화의 분포 범위가 서로 정확히 일치한다.
우리는 요서 일대에 분포된 하가점하층 문화는 동아시아 문명의 서광인 홍산문화를 이어
4000년 전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건국한 고조선이 남긴 유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기록은 고고학적으로도 증명이 되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겠다”라고 말했다.

또한 고조선의 강역과 관련해서는
“고조선의 서쪽 강역은 전국시대 이전에는 산동성 동부 일부와 하북성 서북부, 중남부를 포괄하였다.
연 나라의 전성기에 하북성 서북부와 동북부 일부를 상실했으나
진 한 시대에 중원이 혼란한 틈을 타서 다시 회복했다.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 무제가 논공행상을 할 때
유공자들에게 나누어준 봉지를 보면 압록강 유역의 지명이 아니라
산동성 동부에 있는 지명들이 나타난다.
이는 한나라 때 오늘날 산동성의 동부가
고조선 영토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유력한 증거라고 하겠다”라고 전했다.
 
비파형동검.<국립중앙박물관>

이어
“근래 비파형 동검의 출토 상황을 살펴보면
산동성 동부, 하북성 서북부, 서남부,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망라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중국의 하북성 보정시 망도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한국의 전라남도 보성군과 경상남도 진주 등지에 이르기까지

실로 한반도, 요동반도, 산동반도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비파형 동검의 출토지는 문헌에 기록된 고조선의 강역과 일치하며
고고학적으로 고조선 영토의 범위를 뒷받침하는 유력한 증거라고 하겠다”라고 했다.

그는 연구를 통해 기원전 24세기 고조선 건국이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이며
고조선 영역도 현재 베이징 시 북쪽에 있는 조하는 북송 시대까지 조선하(湖鮮河)였으며
바로 <사기>에서 말하는 연나라와 조선의 국경이며
나중에 한나라와 조선의 국경이기도 한 패수를 의미한다고 한다.
고조선의 국경이 베이징 인근에 있었다는 의미이다.

박선희 상명대 교수는 한국 고대복식연구를 통해 고조선의 영역을 추정했다.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출토된 복식 자료 가운데 출토랑이 비교적 풍부한
가락바퀴, 나뭇잎과 원형모양의 장식, 긴 고리모양의 허리띠 장식, 갑편 등이 그 문양이나 양식에서
공통성을 지니면서도 중국이나 북방 지역의 것과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찰했다.”
저자는 복식 재료도 유사하다는 점을 밝히고 같은 복식을 생산하고 사용했던 사람들이
공통의 귀속 의식을 가진 하나의 국가에 속한 주민들이라 봤다.

고조선을 보는 상반된 시각

앞서 본 바와 같이 고조선을 보는 사학계의 입장은
고조선 역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고조선의 강역’과 ‘고조선의 연대’를 보는 시각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고조선 연대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유물·유적 등을 통해 <삼국유사> 등에서 기록한 바대로
기원전 24세기경으로 보는 견해와 기원전 4~5세기 경에 성립한 국가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고조선의 강역에 대해서는 시대에 따라 변천했겠으나
고조선이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에 존재했다고 보는 입장과
한반도, 만주, 요동 및 요서를 포괄하고 있었다는 입장이 명확히 갈라진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한사군까지 이어져서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도
한반도 존재설, 요서 지역 존재설 등으로 나뉠 수밖에 없게 한다.

이러한 입장 차이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윤내현 교수는 <고대문헌에 보이는 한국고대사의 두 가지 체계(고조선 연구 제1호, 2008)>라는 논문을 통해
이러한 두 가지 입장이 나타난 배경을 설명한다.

윤 교수는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기자조선이 단군조선의 중심부에 위치하지 않았고 그 서부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달리 <제왕운기>에는 기자조선이 단군조선의 뒤를 이어 그 중심부에 위치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라고 했다.
즉,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나타나는 한국 고대사 체계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과 중국 문헌에는 한국 고대사에 대해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체계가 존재하게 됐다.

<삼국유사>에 따라
‘고조선(단군조선)→열국시대로 이어지는 체계’와
<제왕운기>에 따라 ‘고조선(단군조선, 진조선)→기자조선(후조선, 준왕)→위만조선(위만, 우 거)→한사군→열국시대’로 이어지는 체계가 그것이다.

한국 고대사에 대해 완전히 다른 두 역사 체계가 나뉘게 되었으니 둘 중 하나는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체계를 좀 더 살펴보자.

이 체계는 주로 중국 문헌에서 확인되며 <삼국유사> 고조선조 내용과도 같다.
윤 교수는 “<삼국유사>와 중국 기록에 나타난 한국 고대사 체계는
고조선이 한반도와 요동·요서 지역을 활동 무대로 하여 계속 존속하다가
중앙의 통치력이 약화되자 여러 나라로 분열돼 열국시대가 출현한 것이 된다.

그리고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 등은 고조선의 중심부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아니라
고조선의 서부 변경 지대, 즉 지금의 요서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들로서
이들은 한국사의 주류가 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서> <진서> 등에서 기자조선이
지금의 하북성 창려현 난하 유역의 갈석산 부근에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점 등을 논거로 들었다.

오늘날 통용되는 한국 고대사 체계는 <제왕운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앞서 설명한 <삼국유사> 체계와는 전혀 다른 내용의 역사가 전개된다.
오늘날 주류 사학계가 받아들이는 한국 고대사 체계는
단군조선→준왕→위만조선(위만, 우거)→한사군→열국시대 체계인데
앞서 본 <제왕운기> 체계에서 기자조선의 존재만 부인하고 그 자리에 준왕을 대신 등장시켰다.

윤 교수는 중국 문헌에 따르면 <삼국유사> 체계가 명확한데도
<제왕운기>와 <고려사>를 통해 기자조선이 한국 고대사 체계에 들어오면서
한국 고대사에 왜곡이 일어나게 됐다고 설명한다.
즉 한민족 국가인 고조선에 상나라 제후였던 자가 상이 주에 멸망하자
고조선에 들어와 단군조선을 이어받게 된 것이다.

또 위만이 기자의 후손인 준왕의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세우고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데 따라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이 한국 고대사의 주류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 역사 체계에서는 고조선(전조선)·기자조선(후조선)·위만조선을 삼조선이라 부르고
지금의 평양이 도읍지였고 한사군도 같은 지역에 있었으며 열국시대가 그 뒤를 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한국문헌의 한국 고대사 체계가 중국문헌의 기록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고려시대에 기자를 고조선의 뒤를 이은 통치자로 잘못 등장시킨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그리고 한사군은 고조선 서부변방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
한국 고대사의 주류 체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조선의 연대 문제와 강역 문제는 한국 고대사의 핵심이자 기본 골격이다.
앞서 소개한 학자들의 연구와 주장들 외에도 학계에서는 서로 다른 두 입장을 견지하는 깊은 연구들이 있었고
또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 현존하는 한국 및 중국 사서는 물론 한민족 활동 무대였던
중앙아시아와 유라시아 대초원의 역사 기록 등 우리 역사와 관련된 수많은 고대 사서를 엄밀하게 재해석해야 한다.

동북아 일대와 유라시아 대초원 등에서 발굴돼 한민족 고대사를 유추할 수 있는
수많은 고대 유적과 유물 등에 대한 연구와 고증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복원해 나가야 한다.

1960년대 이후 중국의 홍산 지역에서 쏟아져 나와 세계를 놀라게 하고
지금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 고대 유적과 유물들은
앞으로 고조선 역사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부분은 다음 장에서 다시 논하고자 한다.


최고관리자 19-09-01 21:43
 
지도는 운영자가 직접 그린 지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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