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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8-01 15:51
동사(東史) 단군본기(檀君本記)_누가 신화라 하는가?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595   추천 : 0  
   http://www.insight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539 [61]
   https://youtu.be/3F2KbHcfwak [39]

[김석동 위원장의 활동을 적극 지지 환영합니다. 짝 짝 짝!_복본!]

* 고조선 이전 태백산 아래 환인·환웅의 배달국 있었다

- 글쓴이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http://www.insight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539
 
- 땅 넓이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중국은 ‘동북공정’ 역사침탈

한민족 역사와 관련한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 나라와 통치자라 할 수 있는 이름은 ‘환국(桓國)’ ‘환인(桓因)’이다.
아직까지 유적이나 유물, 관련 사서들에 의해 나라의 존재 시기나 위치 등을 확증할 수는 없으나 여러 사서에서 이 이름에 대한 기록들을 남기고 있다.
따라서 한민족 상고 역사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기록이 말하는 환국의 역사

고려 충렬왕 때 일연(1206~1289년)이 지은 <삼국유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조선 이전에도 나라 또는 통치자가 존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옛적에 환인(桓因)이 있었다(제석을 이른다).
서자부에 환웅께서 계셨다.
항상 천하에 뜻을 두었으며, 인간 세상을 탐구했다.
아버지께서 자식의 뜻을 아시고 삼위태백을 살펴보시니 가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라.
이에 천부인 삼개를 전수하시고, 그 이치로써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께서 무리 3000명을 이끌고 가셨다.
태백산 정상(즉 태백은 현재의 묘향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가셨다.
이름하여 신시이며, 환웅천왕이시다.”

이 기록은 사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손보기 교수가 보관하다 연세대에 기증한 조선 초기 간행본인 <삼국유사> 파른본의 내용이다.
한편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된 조선 중종 때 간행된 정덕본(正德本)에는 환인이 환국으로 기록돼 있다.

이같이 조선조에 발간된 <삼국유사>의 판본들에서는 두 가지 기록 (환인-환국)이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조선 시대에는 상고 역사의 시작인 환인, 환국을 같이 인식하고 있었던 데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수산(修山) 이종휘는 조선 후기 영조·정조 때의 학자로 <수산집>이라는 문집을 남겼다.
이 문집의 일부인 <동사(東史)>에서 고조선, 삼한, 부여·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다루고 있는데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단군본기(檀君本記)>를 서술했다.

그는 고조선을 신화가 아닌 실존했던 나라로 인식하고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를 전개했다.
그리고 환인-환웅-단군-부루(夫婁)로 이어지는 세계(世系)를 밝혔다.
고조선 이전에도 세계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다음은 <동사> 단군본기의 기록이다.

“조선왕 단군의 할아버지는 신인(神人) 환인(桓因)이다.
환인에게는 환웅이라는 서자가 있었다.
환웅은 태백산에 살았는데 신웅(神龍)의 이적으로 박달나무 아래서 (단)군을 낳았기 때문에 단군(君)이라고 이름했다.”

1462년 조선 세조 8년 권람이 쓴 <응제시주(應製詩社)>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에게 서지부에 대인 아들이 있었는데 웅(雄)이라 불렀다.
아래 세상으로 내려가 교화하고자 뜻이 있었기에 천부인을 받으시고 3000명을 거느리고 신단수 아래로 내려 오셨으니 이름하여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불렀다.”

영의정을 지낸 조선 후기 현종·숙종 때 문인 남구만은 <약천집(藥泉集)>에서 <삼국유사>를 인용해 환국의 존재를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옛 기록의 설명에 이르기를 옛적에 환국이란 나라가 있었다. 제석을 이른다. 서자부 환웅께서 계셨다.”
 
조선 영조·정조 시대의 성리학자 유광익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풍암집화(楓巖輯話)>에서 <삼국유사>의 환국을 인용하고 있다.
내용은 <약천집>과 같다.

조선 중기 중종·인종 시대의 문신인 정황의 <유헌집(遊軒集)>에는 다음의 기록이 있다.

“책상 위의 티끌은 3년의 세월이 두텁게 쌓였구나. 나라의 근본이 하나의 깃발로 휘날리는구나. 어찌 환국을 삼가 기억하지 않겠는가?”

조선 후기 영조·정조 시대의 문신 이복휴는 상고 시대부터의 우리 역사를 시로 읊은 <해동악부(海東樂府)>에서 환국을 기록했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옛적에 환국이란 나라가 있었다.
서자부 환웅께서 계셨다.
환국에는 환인이 계셨고, 환인에게는 환웅께서 계셨다.
부친께서 자식에게 명하기를…”

조선 시대 후기 순조·헌종 시대의 문신 홍경모는 그의 문집 <관암전서(冠巖全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잡기에 이르기를 조선 이전에 환국이 있었으며, 제석의 서자부에 환웅께서 계셨다.
천부삼인을 전수받으시고 그 무리들과 더불어 태백산 아래로 이주하시니라.
그 산 위에 신단수가 있었다.
옛날에 환웅은 신시의 천왕이셨다.
그리고 환웅의 자손이 단군이라 불렀다.”

이외에도
고려 충렬왕 13년 1287년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
<조선왕조실록(세종, 단종, 성종, 선조, 현종, 영조, 정조 편)> <세종실록지리지> 등에도 환인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아래는 위서 논란이 있으나 주목할 만한 사서들이다.
여기서 환국과 환인의 기록을 살펴보자.

환국 역사 3000년, 배달국으로 이어져

신라 시대 승려 안함로가 지은 <삼성기 상(三聖記 上)>과
고려 공민왕 때 원동중이 지은 <삼성기 하(三聖記 下)>,
고려 말 행촌 이암이 지은 <단군세기(檀君世記)>,
이암의 현손이며 조선 연산군·중종 시대 학자인 이맥(李陌)이 편찬한 <태백일사(太白逸史)>,
고려 공민왕 때 범장(范樟)이 저술한 <북부여기(北夫餘記)> 등의 사서를
일제강점기인 1911년 계연수가 한 권의 책으로 엮어 <환단고기(桓檀古記)>라고 이름 지었다.

이 사서들에서 기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삼성기 상>의 기록이다.

“우리 환국을 세운 것은 아주 오랜 옛날이다.
한 신이 사백력의 하늘에 있으면서 유일한 신이 되어 밝은 빛을 우주에 비추었다.
이에 권능으로 형체를 변하여 만물을 생기게 하였으며 오래 살면서 그것을 보고 항상 즐거워했다.
지극한 기를 타고 다니니 묘함이 자연과 어울렸고, 형체가 없이도 보며, 하는 것이 없어도 만들며, 말하지 않고 행했다.
어느 날 동녀 동남 800명을 흑수와 백산 땅에 내려 보냈다.
이때 환인은 감군이 되어 하늘에 살면서 돌을 쳐서 불을 만들어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가르쳤다.
이것을 환국이라 하며 환인을 친제환인씨 또는 안파견이 라고도 한다.
7세를 이어 내려왔으나 그 햇수는 알 수가 없다.”

<삼성기 하>에도 다음의 기록이 있다.

“옛날에 환국이 있었는데, 백성들이 부유하고 또 수도 많았다.
처음에 환인이 천산에 살면서 도를 얻어 오래 살고 몸에는 병이 없었다.
하늘을 대신해 사람을 교화해 싸움이 없게 하고 사람들은 스스로 힘을 내어 일을 하므로 굶주림과 추위가 없었다.
혁서 환인, 고시리 환인, 주우양 환인, 석제임 환인, 구을리 환인으로 이어져 지위리 환인에 이르렀다.
지위리 환인을 혹 단인이라고도 한다.
고기에 말하기를, 파내류 산 아래에 환인 씨의 나라가 있었다.
천해 동쪽 땅을 파내류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이 5만 리, 동서가 2만여 리인데 이것을 모두 환국이라 한다.…7세를 이어 그 역년이 모두 3301년인데….”

또 <태백일사>에도 환국 기록이 있다.

“전에 말하기를, 삼신의 뒤를 환국이라 하고 환국은 하느님이 사는 나라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삼신은 환국보다 먼저 있었으며 나반이 죽어서 삼신이 되므로 삼신은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다.
사람과 만물이 다 같이 삼신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삼신을 한 뿌리의 조상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환인이 삼신을 대신하여 환국의 천제가 되었다.”

<삼성밀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파내류 산 밑에 환인 씨의 나라가 있었다.
천해의 동쪽 땅도 파내류국이라 하는데 그 땅의 넓이는 남북이 5만 리 동서가 2만여 리이다. 이것을 통틀어 환국이라 한다.”

<조대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옛날에 환국이 있었는데 백성들의 생활이 부유하고 풍족했다.
처음에 환인이 천산에 있으면서 도를 얻어 오래 살고 몸을 다스려 병이 없었다.”

1075년 조선 숙종 때 북애(北崖)가 쓴 <규원사화(揆園史話)>에도 관련된 기록이 있다.
<규원사화>는 고려 공민왕 때 이명이 <진역유기(震域遺記)>와 40여 사서를 바탕으로 쓴 것이라 하는데
<진역유기>는 예로부터 존재하던 고대 사서 <조대기(朝代記)>를 보고 썼다고 한다.

이 사서는 1972년 국립중앙도서관의 이가원·손보기·임창순 3인의 고서심의위원이 1675년에 작성된 진본임을 확인하고 귀중본으로 지정한 책이다.

“상계(上界)에는 문득 하나의 큰 신(神)이 있었으니 그는 환인이요 온 세상을 다스리는 무량(無量)한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발해 건국자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727년에 저술한 <단기고사(壇記古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환씨전(桓氏典)에, 동방에 부여족이 태백산 부근에 흩어져 살았는데,
그중 환인은 관대하고 도량이 커서 가옥의 건축과 의복제도를 시작하고, 아들 환웅을 낳으니, 그 뛰어난 모습을 호걸이라 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 상고사와 관련해 고조선 건국 이전 최초의 나라 또는 통치자로 생각해볼 수 있는 환국-환인에 대해 여러 기록이 남아있다.
한편 <삼성기 상·하> 와 <태백일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환국은 넓이가 남북 5만 리, 동서 2만 리에 달했다 한다.

또 환국의 군장인 환인은 7대를 이었고 환국이 지속된 역년이 3301년이라 한다.

단군을 군장으로 하는 고대 국가인 고조선마저도 한편의 민족설화나 신화로 치부되는 상황에서
기록이 남아있는 단군 이전의 상고 역사는 어떻게 평가받아야 할 것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대목이다.

‘박달나라의 임금’

한민족은 배달민족이라 불린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편찬한 <한국민족 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배달은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로 그 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숙종 때 북애가 지은 <규원사화>에서 단군은 ‘박달나라의 임금(檀國之君)’을 말하며
우리말에 ‘단(檀)’을 ‘박달’ 혹은 ‘백달’이라 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또 일각에서는 배달은 밝다는 뜻인 ‘배(밝)’와 땅을 의미하는 ‘달’을 합친 말로 동쪽으로 향해 간 것을 의미한다고 하기도 한다.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 BC 24세기에 건국했다는 고조선을 신화로 취급하고 있으나
고조선 이전에 존재했던 한민족 국가에 대한 기록들이 엄연히 우리 사서에 남아있다.

배달국의 존재를 나타내는 ‘배달-신시(도읍지)-환웅(임금)-청구(국명 또는 지명)’ 등에 대한 기록은

일연(1206~1289년)의 <삼국유사>,
권람(1416~1465년)의 <응제시주>,
유희령(1480~1552년)의 <표제음주동국사략>,
홍언필(1530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
권문해(1534~1591년)의 <대동운부근옥>,
허목(1595~1682년)의 <기언>.
남구만(1629~1711년)의 <약천집>,
홍만종(1643~1725년)의 <해동이적>,
유광익 (1713~1780년)의 <풍암집화>,
이종휘 (1731~1797년)의 <동사>,
홍경모(1774~1851년)의 <관암전서>,
안정복(1778년)의 <동사강목>,
이복휴의 <해동악부> 등이 있다.

앞서 소개한 위서 논쟁이 있는 <환단고기>의 <삼성기 상·하> <태백일사>와 <규원사화>에는 좀 더 상세한 기록들이 있다.

<삼성기 상>은
“환웅 씨가 그 뒤를 이어 일어나서 하느님의 명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와 천평에 자정과 여정을 파고 청구에 정지를 만들었다.
천부인을 가지고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였으며 세상이 하늘의 이치에 맞도록 교화되어 사람을 널리 유익하게 하였다.
도읍을 신시에 세우고 나라 이름을 배달이라 하였다”고 기록한다.

<삼성기 하>는
“이때 환웅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라 하며 이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
풍백·우사·운사를 시켜 곡식과 임금의 명과 형벌과 질병과 선악 등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 다스리게 하여
세상을 이치에 맞도록 교화하여 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하였다”
“배달은 환웅이 하늘을 열면서 얻은 호칭이다.
도읍한 곳은 신시이며 뒤에 청구로 옮겨 18세를 이어 전하였다.
역년은 1565년이다”라고 한다.

<삼성기 하>는
18세에 걸친 임금(환웅)의 이름과 역년도 소개하고 있다.

<태백일사>는
<진역유기> <삼성밀기> <삼한비기> <조대기> 등 고대 사서와 중국 사서를 인용했음을 밝히면서
배달국의 역사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첫 임금인 환웅천황의 건국기, 태고문자의 시작, 치우천황의 탁록대전 등을 기록하고
배달국의 시작인 신시의 개천으로부터 18세를 이어 1565년이 지나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이 일어났다고 한다.

<삼성기 상·하>와 <태백일사> 등의 기록은
고조선 건국 이전에 배달국이 존재했고 다수의 임금이 대를 이었으며
도읍지가 처음에 신시에서 청구로 옮겼다고 하는 고대국가의 존재를 설명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중국 랴오닝성과 내몽골 자치구 일대에서 발견된 고조선 이전 문화인 홍산문명은
이 일대에 존재했던 고대문명과 고대국가에 대해 엄청난 역사적 사실을 증거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홍산문화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기술하겠다.

한편 배달국 기록과 관련해서 ‘치우천황’을 빼놓을 수 없다.
치우천황은 고조선 건국 이전에 동북아에 존재했던 나라의 통치자로 알려져 있다.

치우천황에 대해서는 중국 사서에도 기록들이 있다.
한나라 무제 시대의 사관 사마천(BC 145~BC 86)은
중국 역사 25사의 첫 시작인 <사기> 의 <오제본기>에서
“치우가 반란을 일으키고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자 황제가 제후들의 군사를 징발하여 탁록의 들판에서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명한 ‘탁록대전’에 대한 내용인데 치우천황과 전쟁했다는 황제 헌원은 중국 신화에서 삼황(三皇)에 이어 중국을 다스렸다는 오제(五帝)의 첫 번째 왕이다.

<사기>에 담긴 치우천황
 
치우상이 담긴 귀면와.<국립중앙박물관>

이 외에도 중국 사서에 치우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다.
<사기>를 비롯한 <관자> <태평어람> <산해경> <후한서> 등에서는
‘치우의 형제가 81명이며 몸은 짐승이나 사람 말을 하였다’
‘구리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졌다’
‘모래와 돌을 먹었다’
 ‘칼·창·큰 활 등 병장기를 만들었다’
‘쇠를 제련하여 창 등 무기를 만들었다’고 전해오는 이야기와
치우 무덤의 존재 위치, 제사 관례를 기록함으로써
치우가 실존 인물이며 철제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중국과 전쟁을 한 이민족 국가의 통치자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삼성기 하>는 18대 환웅 중 14번째 환웅인 치우천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또 몇 대를 지나 자오지환웅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신령스러운 용맹이 있어 크게 뛰어났다.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하고 큰 안개를 일으켰으며 구야를 만들어 광석을 캐고 쇠를 녹여 병기를 만들었다.
이에 천하가 크게 두려워했다.
세상에서는 이를 치우천황이라고 한다.
치우는 천둥 치고 큰비가 내려 산하를 바꾸어 놓는다는 뜻이다.
치우천황이 염제신농이 쇠해 가는 것을 보고 큰 뜻을 품고 자주 서쪽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또 색도로부터 군사를 진격시켜 회대 사이의 땅을 점령하였다.
헌후가 일어나자 즉시 탁록들로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
뒤에 오장군을 서쪽에 보내어 고신을 쳐서 공을 세우게 하였다.
이때 천하는 셋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탁록의 북쪽에는 대요가 있고 동쪽에는 창힐이 있고 서쪽에는 헌원이 있었다.
서로는 자기의 병력을 가지고 이기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에 헌원이 치우보다 늦게 참전했기 때문에 싸울 때마다 불리하여
대요에 의지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 창힐에 의지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음은 <태백일사>에서 밝히는 황제 헌원과의 탁록대전의 내용으로, 중국 사서 내용과 전쟁 결과가 다르다.

“천황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시켜 탁록을 포위하게 하여 멸망시켰으나 헌원은 그래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고자 하였다.
천황은 구군에 동원령을 내려 네 길로 나누어 진격하게 하고 스스로 보병과 기병 3000명을 거느리고 곧장 헌원과 탁록 유웅들에서 계속 싸웠다.
이때 군사를 풀어 사방으로 조여 들어가게 하여 베어 죽이기를 수없이 하였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하고 싸움을 독려하였다.
적군은 두려움에 손을 떨며 목숨을 걸고 도망쳤다.
100리 사이에는 적의 병마를 볼 수 없었다.”

“치우천황이 군대의 진용을 정비하여 사면으로 진격한 지 10년 동안 헌원과 싸운 것이 73회나 되었다.
그런데도 장수들은 피로한 기색이 없었고 군사들은 뒤로 물러설 줄 몰랐다.
뒤에 헌원은 여러 차례 싸워 천황에게 패하고도 더욱 군사를 크게 일으켰다.
심지어 우리 신시를 본받아 새로운 무기와 갑옷을 만들고 또 지남거를 만들어 백번이나 싸움을 걸어왔다.
이에 천황은 불같이 노하여 형제와 종친에게 싸움준비에 힘쓰도록 하고 위세를 떨쳐
헌원의 군사가 감히 싸울 뜻을 갖지 못하게 하려고 한 판 크게 싸워 한 개의 진을 여지없이 무찌른 뒤에야 싸움을 그쳤다.
이 싸움에서 우리 장수 치우비가 공을 급히 세우려 하다가 불행히 진중에서 죽었다.
<사기>에서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규원사화>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이때 헌원이란 사람이 유망이 패하여 달아나고 치우 씨가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 임금이 되고자 했다.
헌원은 군사를 일으켜 치우 씨에게 도전했다.
치우 씨는 탁록들에서 헌원을 맞아 크게 싸웠다.
이때 군사를 풀어 사방을 치니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적군의 마음이 흐려지고 손이 떨려 급히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졌다.

치우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사기> 등에서 ‘구려(九黎)의 임금’ ‘구려임금의 호칭은 치우’라고 하고 있다.
즉 중국과 전쟁한 이민족 국가의 통치자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성수 명예교수는 고조선의 역대 단군이 치우를 만고의 무신(武神)으로 우러러 제사를 지냈고
중국조차 산둥성 궐향성에 있는 치우의 능에서 매년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한다.

그는 또 귀면와의 도깨비상 주인공은 치우상이며 한국인이 국난이 있을 때마다 우러러 숭상하던 한국인의 장군상이자 병신(兵神)이라고 한다.

중국, 동북공정으로 배달국 역사 삼킨다

치우천황은 탁록대전이 기원전 2600년경의 사건이기 때문에 실존했다면 고조선 이전 인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탁록대전에 관한 역사 기록은 고조선 이전에 동북아에 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고조선조차 신화로 치부해 버리는 우리의 기존 역사 인식의 틀에서는 배달국을 실존 역사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달라진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동안 역사 시대를 기록이 남아있는 주나라 시대인 기원전 9세기경으로 보다가
동북공정을 시작하면서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통해 이제는 하나라의 시작을 기원전 2070년으로 설정했고
치우와 황제가 전쟁을 벌인 탁록대전을 기원제 2600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 인정했다.

1995년 베이징 인근 탁록현에 귀근원(歸根苑)이라는 절을 세우고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이라는 사당을 지었다.
이 사당에는 치우, 황제, 염제의 상이 나란히 앉아 있다.
원래 중국인들은 염제, 황제를 자기들의 조상으로 하여 ‘염·황 후예’라고 해왔다.
중국 하남성 정주시에는 2007년 20년이라는 대역사 끝에 염황 이제(二帝)의 조각상이 세워진 바도 있다.

그러나 역사 공정의 진행 과정에서 동이족의 왕이자 한민족의 조상인 치우천황을 염제·황제와 함께 중화문화의 공동 시조로 영입해 버렸다.
우리가 기원전 24세기에 존재했던 고조선을 신화로 인식하고 있는 사이에
고조선 이전 배달국 시대에 활약했던 동이족 지도자를 중국인의 조상으로 둔갑시켜 버린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역사 공정의 배경은 황하문명 등 중국이 주장해온
그들의 고대 문명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꽃피웠던 홍산문화의 유적이 내몽골, 랴오닝 성 일대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최고관리자 19-08-01 15:57
 
* 유투브 동영상 참고자료

https://youtu.be/3F2KbHcfw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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